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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하여/책 이야기

[책이야기/에세이] 이영희 - 안녕, 나의 순ㅡ정

by JD66786556 2020.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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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순정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 대한민국 순정만화 전성기를 한 권으로 추억할 수 있는 <안녕, 나의 순정>. 이름만 들어도 우리를 설레게 만드는 대표 작가 15인의 만화에 담긴 이영희 작가의 추억을 함께 따라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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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 구매. 부록 포스터북 받을걸 -_- 

 

  예전에 SNS에 이런 글이 올라온 적이 있었다. "오그라든다" 는 단 한마디의 말이 우리가 느끼는 진지한 감정들을 얼마나 억누르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요새는 이 오그라듦의 자리를 '과몰입' 이라는 표현이 대체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두 표현 모두 처음 등장은 개인의 내면이나 감정에 과도하게 심취하다보니 타인과의 괴리가 생기고 소통이 되지않아 우스꽝스럽게까지 보이는 것을 경계해서 나온 표현이었다는 점에서 두 표현의 결은 비슷하다.  하지만 이런 표현들은 이제는 떤 대상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가지는 것 자체를 비웃는 것이 되어버렸다. 

요새는 어떤 대상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갖는 것은 촌스럽게 여겨진다. 대상을 최대한 가볍게 바라보고, 표면만 즐기고, 나 자신을 대상에서 항상 멀리 떨어트려둔다. 그러면 나는 안전하다. 혹시나 내가 관심을 가졌던 그 대상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도, 나의 관심은 '진짜'가 아니었기 때문에, 진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것을 비웃음의 대상으로만 삼는 염세주의적인 태도는 사실 극단적인 자기방어다. 최근의 대중문화는 이런 점을 극단적으로 반영한다. 모든 것을 유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풍자나 해학의 영역이 아닌 대상을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경우 웃음이라기보단 비웃음에 가깝겠다.) 

나는 소위 말하는 '요즘 사람' 이지만, 그래도 내 청소년기에는 어떤 '감성' 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이제와서는 중2병, 오그라듦, 촌스러움으로 취급되지만, 나를 한없이 진지하게 만들었던 것들은 분명 지금의 나를 만드는 양분이 되었다. 
특히 만화들은 감정을 표출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가끔은 그림보다 많이 차지하는 긴 독백, 시에 가까운 표현들. 그것들은 지금보면 과다하다고 보여질 수도 있겠지만 작가들의 치열하기까지한 표현들은 나를 작품에 '과몰입' 하게 만들었다. 강약 조절은 있되 숨기지않은 감정의 표현은 나를 공감과 몰입에 세계로 쉽게 끌고갔고, 작품을 다 읽고나면 마치 긴 꿈을 꾼 것처럼, 그리고 꿈 속에서 숨을 줄곧 참고 있었던 것 처럼 하 , 하는 긴 한숨과 함께 현실이라는 수면 밖에서 못다쉬었던 숨을 들이쉬곤 했다. 

 이 책은 그 시절, 중2병의 감성에 심취해 주인공의 감정, 그리고 주인공에 나를 이입해서 같이 울고 웃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한다. 작품들을 따라가며 나의 추억을 되짚는 에세이에 가까운 글이다. 만화를 보고 울고 웃었던 그 시절의 나를 되돌아보는 일종의 추억앨범이자, 순정만화라 명명된 이래 주독자가 여자라는 이유로 유치한 것으로 폄훼되었던 순정만화의 본질을 되짚어주는 안내서이다. 작품 하나하나를 철저하게 분석하거나하지는 않았지만, 저자 본인의 삶, 추억을 통해 순정만화의 계보를 짚어나가며 그 시절의 순정만화들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단, 이미 오래된 작품들을 다루고 있어서 완결작들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작품들을 읽을 예정이 있고, 스포일러에 민감하다면 조심하는게 좋을듯.) 

생각했던 것보다는 가벼운 책이었고, 저자분도 나와 최소 10세 이상 나이차가 나는 것으로 추정되어서 완벽한 시대상의 공감은 불가했지만, 언급된 순정만화 뿐만 아니라 90년대 중후반, 2000년대 초반, 혹은 성인이 되어서 접한 시대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에 대한 몰입을 다시 떠올릴 수 있게 해줬다. 

 

  현대의 작품들이 무조건 예전에 비해 피상적인 것만 좇는다거나, 가볍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요새는 오히려 유치하다고 여겨지던 여성만화 (라는게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렇게밖에 표현안되는 그런게 있다.) , 순정만화의 볼륨은 점점 풍요로워지고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퇴화하는건 오히려 소년만화 쪽이고. 하지만 언제나 여성들의 소비는 관심을 못받는다.) 
하지만 그런 작품에 상관없이, 대상이나 감정에 진지하게 빠져드는 태도 자체를 두려워하고 비웃는 분위기는 안타깝다. 과도한 몰입도 분명히 문제가 있겠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을 타인, 대상을 통해 공감하고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분명 좋은 경험이다. 그것이 꼭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어도, 내 안에 있던 흐릿한 감정을 공감을 통해 확인하고 실체화하는건 오히려 감정을 갈무리할 수 있게 도와주고 감정에 과하게 빠져드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중2병, 과몰입, 오그라듦. 가끔은 건조한 삶에 이런 감정적 '과몰입'이 그리울 때가 있다. 단순히 내 자신의 에고에 파묻혀 주변세계와의 소통을 차단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감정을 확인받고 공감해서 한껏 울고 웃고, 해소해버릴 수 있는 이런 경험.  생각난김에, 이번 휴일에는 오랜만에 책장 한켠에서 잠자고 있는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읽어야겠다. 
 

+ 그나저나 이 책 에세이같다고 썼는데 지금 책 정보 따면서 분류 보니까 진짜 에세이네. -_-;; 호호.